만년필에 입문하고 마음에 드는 펜촉을 골랐다면, 그다음에 맞닥뜨러지는 거대한 장벽이 바로 '종이'입니다. 일반 사무용 복사지나 흔한 공책에 만년필을 가져다 댔다가, 잉크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번지거나 종이 뒷면까지 축축하게 배어 나와 당황했던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만년필 유저들이 입을 모아 "종이가 반이다"라고 말하는 데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잉크의 번짐과 비침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인 종이의 무게(gsm)와 표면 가공의 비밀을 알면, 내 만년필과 찰떡궁합인 노트를 실패 없이 고를 수 있습니다.
1. 종이 무게의 단위 gsm, 무조건 높으면 장땡일까?
종이를 고를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수치가 바로 'gsm(Grams per Square Meter)'입니다. 이는 가로세로 1미터 크기 종이의 무게를 그람(g)으로 나타낸 단위로, 쉽게 말해 종이의 두께와 밀도를 뜻합니다.
70gsm ~ 80gsm (일반 복사지 및 경량 노트) 우리가 주변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두께입니다. 만년필로 쓰기에는 다소 얇은 편에 속합니다. 잉크 흐름이 아주 박한 만년필이 아니라면 대부분 뒷면에 글씨가 그대로 비치는 '고스팅(Ghosting)' 현상이 발생합니다.
80gsm ~ 100gsm (만년필 전용 노트의 표준) 로디아, 클레르퐁텐, 미도리 등 만년필 유저들에게 사랑받는 노트들이 주로 이 구간에 위치합니다. 적당한 두께감을 가지면서도 잉크를 잘 버텨내어, 일상적인 필기와 장문 작성을 할 때 뒷면 비침이 현저히 적습니다.
120gsm 이상 (스케치북 및 헤비급 노트) 매우 두껍고 든든한 느낌을 줍니다. 잉크가 뒤로 배어 나올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되지만, 노트 권당 페이지 수가 적어져 두껍고 무거워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주로 다이어리 꾸미기(다꾸)나 수채화 겸용 기록을 할 때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120gsm 이상의 두꺼운 종이가 만년필에 무조건 좋을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종이가 두꺼워도 표면 가공이 부실하면 잉크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사방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52gsm밖에 안 되는 얇은 종이(토모에리버 등)가 만년필 전용지로 극찬받는 이유가 바로 다음에 설명할 '표면 가공'에 있습니다.
2. 번짐을 막는 핵심 열쇠, 표면 가공(사이징)의 비밀
만년필 잉크는 수성(Water-based)입니다. 즉, 종이가 물을 얼마나 천천히, 그리고 일정하게 흡수하느냐가 필기감을 좌우합니다. 이 흡수율을 제어하기 위해 종이 표면에 풀기(Glue)를 입히는 공정을 '사이징(Sizing)'이라고 부릅니다.
내천 가공(내부 사이징)과 표면 가공(외부 사이징) 종이를 만들 때 섬유 자체에 풀을 섞는 것뿐만 아니라, 완성된 종이 겉면에 매끄러운 코팅 처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표면 가공이 잘된 종이는 만년필 잉크가 닿았을 때 곧바로 흡수되지 않고 표면에서 잠시 머물며 마르게 됩니다. 덕부네 잉크 고유의 색감이 온전히 표현되고 테(Sheen)가 아름답게 살아납니다.
코팅지와 비코팅지의 차이 겉면이 반질반질하게 가공된 종이는 필기감이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습니다. 잉크 번짐과 비침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대신, 잉크가 마르는 속도(건조 시간)가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손날로 글씨를 쓸고 지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반면 가공이 덜 된 종이는 사각거리는 손맛이 좋지만 조금만 흐름이 좋은 펜을 쓰면 거미줄처럼 번지기 쉽습니다.
3. 내 만년필에 맞는 최적의 종이 매칭 가이드
어떤 종이를 사야 실패하지 않을지 고민되는 분들을 위해 가이드라인을 정리해 드립니다.
세일러, 파이롯트 등 일제 EF/F촉을 주로 쓰는 경우 펜촉이 가늘고 잉크 토출량이 적당하기 때문에 80gsm 내외의 미도리 MD 노트나 복면사과 까hier 같은 부드러운 미코팅지를 추천합니다. 적당한 사각거림을 즐기면서도 비침 없이 깔끔한 필기가 가능합니다.
펠리칸, 라미 등 유럽제 M촉 이상이나 흐름이 콸콸 나오는 펜을 쓰는 경우 잉크 양이 많으므로 무조건 표면 코팅이 단단하게 들어간 종이를 골라야 합니다. 프랑스산 로디아(Rhodia)나 클레르퐁텐(Clairefontaine) 90gsm 제품이 잉크를 잘 붙잡아주어 거미줄 현상을 막아줍니다.
잉크의 적테, 청테 등 화려한 농담을 온전히 감상하고 싶은 경우 종이는 얇지만 특수 코팅 기술로 비침을 막아낸 토모에리버(Tomoe River)나 산젠(Sanzen) 종이가 포함된 노트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핵심 요약
종이의 두께(gsm)가 높다고 해서 만년필 잉크가 안 번지는 것은 아닙니다.
잉크가 거미줄처럼 번지는 현상을 막으려면 표면 코팅(사이징) 가공이 잘 된 만년필 전용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얇고 흐름이 적은 촉은 사각거리는 종이가 잘 맞고, 굵고 흐름이 풍부한 촉은 미끄러지듯 코팅된 종이가 안전합니다.
다음 편 예고
종이의 비밀을 풀었으니 이제 그 위를 채울 액체의 차례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만년필 잉크의 두 갈래인 염료 잉크와 안료 잉크의 성분별 특징과 나에게 맞는 선택법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만년필로 글을 쓸 때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느낌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연필처럼 사각거리는 손맛을 좋아하시나요? 선호하는 필감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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